기업 재무 담당 직원들의 대규모 횡령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 가운데 최근 수년 동안 직원이 회삿돈을 빼돌려 가상화폐에 투자했다가 처벌받은 사례가 끊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일 연합뉴스가 2020년부터 올해까지 전국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횡령 사건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횡령한 돈을 가상화폐에 투자한 사례가 다수 확인됐습니다.
A씨는 남성용 와이셔츠 제조 업체에서 회계 담당 직원으로 일하며 2019년 3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총 52억8천여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그는 거래처로부터 받은 물품 판매 대금을 자신의 계좌로 빼돌렸는데, 범행을 숨기기 위해 계좌 잔액을 그림판 프로그램으로 수정해 회사에 보고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피해 회사는 2016년 부도가 나 회생절차를 거치는 등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중 A씨의 범행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의 타격을 입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A씨는 횡령한 돈으로 비트코인을 사들이거나 가상화폐 선물 투자에 소비했습니다. 서울남부지법은 “횡령한 금액의 소비 경위에 비춰보더라도 범행의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며 A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습니다.
돈이 아닌 물품을 빼돌리는 사례도 있다. KT의 한 지사에서 대리점 유통 관리 업무를 하던 B씨는 2017년 9월부터 3년간 창고에서 보관하던 갤럭시 스마트폰 등 4천346대를 빼돌려 중고 스마트폰 매입업자에게 판매한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그가 횡령한 스마트폰은 판매가격 기준 55억5천여만원에 달하는 양이다. B씨 또한 판매 대금을 대부분 가상화폐에 투자했습니다. 서울동부지법은 B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습니다. 피해 금액 대부분을 변제한 것이 형량에 반영됐습니다.
기업 외에 학교와 노동조합에서도 돈을 빼돌려 가상화폐 시장에 쏟아붓는 이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회계 관리 교직원으로 일하던 C씨는 2017년∼2020년 교육부 지원금 등 총 5억7천여만원을 빼돌린 뒤 가상화폐에 투자한 혐의로 부산지법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노동조합 총무부장으로 일하던 D씨도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조합원 회비 6천만원을 빼돌려 가상화폐에 투자한 사실이 들통나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지난 4월 그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과거 횡령금은 주로 불법 도박이나 변동성이 큰 투기성 상품에 집중됐는데 가상화폐 가치가 수년간 급등하며 범죄수익이 몰리는 새로운 ‘투자처’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가상화폐 역시 변동성이 커 단기간에 이익을 노릴 수 있는 데다 접근이 쉬워 누구나 돈을 쉽게 쏟아부을 수 있고, 그런데도 정부의 규제망이 뻗기 어려워 범죄 수익을 은닉하기도 쉽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회삿돈을 몰래 쓰고 가상화폐 투자로 큰 수익을 낸 뒤 ‘원금’을 다시 돌려놓기만 하면 문제 될 게 없다는 식의 도덕적 해이도 범행을 부추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횡령한 돈을 변제하더라도 처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최근 적발된 아모레퍼시픽 횡령 직원들도 주식과 가상화폐 등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고, 수백억 원을 빼돌린 계양전기 직원도 약 5억원 어치 가상화폐를 숨긴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습니다.
문제는 가상화폐 투자가 실패로 돌아가면 횡령 피해를 본 기업이나 기관이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데 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 블록체인특별위원회 위원인 조정희 변호사(법무법인 디코드)는 “환수가 가능한지는 시장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최근 루나·테라 사례처럼 가격이 폭락했을 경우 환수가 어려울 것“이라며 “수사기관에서 가상화폐를 압수할 수는 있지만, 스마트폰 비밀번호와 유사하게 피의자가 지갑 주소 등을 알려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